우리가 보고 있는 브라운관 바깥 이야기가 시청자 곁을 찾아간다. 드라마보다 더 재 미있는 방송 뒷이야기는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계속되는 야외촬영의 현장을 생생하 게 전한다. 주인공 이서진 씨, 한상진 씨 등이 추위를 이겨내는 모습 등을 만날 수 있 다. 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이산의 팬들에게도 일일이 사인해 주는 친절한 이산 팀 의 모습도 볼 수 있다.
2. 하이라이트
1회부터 40회까지의 간추린 이야기를 하이라이트로 보여준다. 첫 회 뒤주에 갇힌 사 도세자를 몰래 찾아온 어린 산과 그 과정에 만나게 된 송연, 대수 이야기부터 끊임없 이 계속 되는 암살 위협 등 지금까지의 드라마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3. 캐릭터별로 본 스토리 흐름
극 초반 이산은 나약한 이미지로 비춰졌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군주로서의 카리스마 가 드러난다. 뛰어난 통치력과 포용력으로 수백 년 이어온 파당 정치를 해소하고 실 물 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조선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한 천재 군주 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렇듯 변화된 캐릭터로써 스토리의 흐름을 살 펴본다. 또 ‘이산’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 ① 산-송연-효의 ② 산- 송연- 대수 의 삼각관계 이다. 그들의 뒤엉킨 러브라인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 기대된다. 또 다른 러브라 인 ‘대수와 초비’, ‘달호와 막선’ 도 궁금해진다. 고자임이 밝혀져 냉전 상태인 달호 와 막선, 둘의 향후 관계는? ‘이산’에는 러브 라인뿐만 아니라 앙숙 관계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데 홍국영 대 정후겸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차가운 눈빛을 교감하며 불꽃을 만들어내는 드라 마속 앙숙들을 만나본다. 이 외에도 영조, 정순, 화완의 모습을 찾아 각 캐릭터별로 어떤 이야기 흐름이 전개 될지 미리 점쳐보는 시간을 갖는다.
4. 이산만의 매력
‘이산’만의 매력 속으로 흠뻑 빠져드는 시간 여행. 사극에서 처음 선보이는 궁중도화 서와 세자 익위사의 모습들. 또 10여 차례의 세손 및 국왕 암살 미수 사건들!
① 도화서를 배경으로 한 그림의 향연
11회에서 시권을 제출한 과거 참석자들의 용모 그리기와 6회에서 사신단을 위해 그 림 그리기 등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스토리상 중요한 단서로서 활약한다.
② 마치 한편의 수사극을 보는 듯한 치밀한 구성은 인기 유지의 비결!
- 9부: 송연이 그린 어릴적 그림을 보고 송연을 알아보는 세손 - 13부: 의궤도를 통해 사도세자 익위사들의 무죄 밝히는 세손 - 26부: 나례희 행사장 자리배치가 작년 의궤도와 달라진 것을 보고 음모 추모 추적 하는 홍국영 - 사도세자가 그린 그림을 통해 아들의 무죄를 깨닫고 가슴아파하는 영조~
그림 외에도 사건을 풀어가는 싸인들이 마치 추리수사극을 방불케 한다.
- 4부: 조총의 제조 날짜를 보고 세손의 무고함을 알게되는 영조 - 10부: 대신들 앞에서 북저를 이용해 휘조 위조 방법 보여주는 영조 - 12회: 궐담하여 불을 지른 역당들의 시체에서 ‘마름’이란 풀을 발견한 이산
③ 무협지를 보는 듯 실감나는 무술 실력
- 14부: 정후겸 일파의 사병 근거지를 찾아내 공격하는 세손의 병사들 - 17부: 암살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이산의 능행에 앞서 행렬 시작하는 익위사들. 말 달리는 장면 장관 - 17부: 세손 대신 화살맞는 대수. 이어 익위사 대 정후겸 군대의 전투 장면 - 28회: 저자거리에서 미행 당하는 홍국영과 대수가 무리들을 물리치는 액션신 - 29부: 홍국영이 이끄는 익위사들이 정후겸의 병사들을 미행, 한밤중의 싸움 싸움 끝날 무렵 등장해 화살 쏘는 이산 - 33회: 백동수와 서장보의 무예대결
5. 이산의 명장면, 명대사와 함께 NG 퍼레이드를 통해 본 NG의 대왕, 그리고 최고 의 애드립 연기자를 만날 수 있다.
6. 사극을 보면서 느끼는 궁금증. 어디까지가 역사이며 어디까지가 픽션인가? 김이영 작가와 이병훈 감독의 인터뷰, 또 역사학자 박광용(가톨릭대학교 인문학부 국사학 전공) 교수를 통해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준다. 또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대 한 힌트를 찾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의 일인자로 백동수를 다시 천거하였다. 1788년 그는 장용영 초관의 벼슬을 받게되었다. 이듬해 가
을, 백동수는 정조의 명으로 당시 규장각에 있던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군사무예서 편찬작업에 들
어간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는 발로 뛰어 문헌기록을 하나하나 살피고, 무예에 뛰어난 장교 여종주,
김명숙과 함께 군영마다 약간씩 차이 나는 무예의 기법을 통일하였다.
그리하여 1790년, 각고의 노력끝에 보병무예 18가지와 마상무예 6가지를 합친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 지게 된다. 이 책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의 중앙 군영은 물론 팔도의 군영에 보급되
어 군사훈련의 교범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서거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802년 정월, 개혁정치와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던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을 반대했던 노론벽파에 의해 해체되었고 개혁인사들, 특히 군사
적 역량을 장악했던 무장들이 축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 역시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고 유배형
을 선고받는다.
결국 장용영은 해체됬고 백동수는 1816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료후배들은 그를
가리켜 "다시 못볼 기남자"라 칭하였다.
박제가 [朴齊家, 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
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에게 새학문을 배웠으며 귀국하여 《북학
의》를 저술했다.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출생에서부터 신분적 차별을 받았으나, 일찍부터 시(詩)·서(書)·화(畵)로 명성을 얻었다. 19세 무렵
부터 북학사상의 선구적 인물인 박지원(朴趾源)을 스승으로 따르며,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 恭) 등 북학파들과 서울에서 가까이 살면서 교유(交遊)하였다. 29세 때(1778) 청나라에 사은사(謝恩 使)로 판견된 정사(正使)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연경(燕京)에 가서 건륭(乾隆)시대
청조(淸朝) 문물을 접하고,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대표작 《북학의(北學議)》는 청나라를 가서 보고 들은 견문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으로 우리의 사
회적 폐단을 성찰하고 농기구·수레 등 기구의 개량과 사회제도의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듬해 정
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규장각검서관(檢書 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