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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21 이산 20회 줄거리 및 21회 예고 와 앞으로 전개
드라마 리뷰2007. 11. 21. 12:13

이산 20회 줄거리 입니다.

이산 20회 다시보기 만큼 세세한 내용입니다.



이산 대리청정 첫실시를 하는 것으로 시작을 한다.

난전몰수권으로 꼬투리를잡아서 대소신료들을 휘어 잡는다.

시전상인과 노론들의 유착관계를 대충 눈치를 채는 이산...

영조가 너무 좋아라 한다.  영락없는 자신의 손자 이라고..

영조가 아끼는 말이 있는것 같다

본인이 볼때는 사도세자는 자신의 잘못으로 죽었다는 후회의 말일것이다.

홍국영은 사헌부 지평 자리로 천거되어 시전상인들과 노론중신들과의 유착관계를

끊어버릴 묘수를 찾으라 명 받는다.

최석주(최경환)이 홍인한을 시켜 홍국영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라 지시한다.

홍국영을 찾아간 홍인한은 세손과의 친인척관계를 들먹이며 도움을 줄테니 언제든지

찾아오라 한다.

정후겸은 송연이 그림을 직접그리는것을 관례가 없는 일이라며 공론화 시키라 도화서에

심어 놓은 강별제에게 지시해 상소를 올린다.

근데 송연이 잡혀가기 전에 세손이 쨘~ 나타나서 구해준당..^^

송연이 화원들의 화서경합에서 5위안에 들면 그림을 그릴수 있게 해준다고 하다.

<박별제가 아마도 송연을 좋아하나??  나이차도 많이 나는디...혹시 박별제의 숨겨둔 딸?? 농담>

오늘도 대수의 삼촌은 주막 주모에게 고자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한다..

사실은 고백을 했는데 .. 고..고자 했는데..

주모가 그만 알아 먹지를 못했당..ㅜㅜ

한편 정후겸과 화환옹주는 화서경합이 빌미가 되어 세손의 개혁이 험한꼴을 당할꺼라 좋아라 한다.

대수 삼촌이 시전상인에게 가게 물건을 다 뺏긴다. 이에 홍국영은 난전을 장사를 할수 있게 해주는

방안을 연구한다 이에 세손은 사흘안에 해결을 해보라 한다.

송연의 그림이 예전같지 않다는 박별제의 보고를 받고 세손은 야밤에 송연을 찾아간다.

송연에게 자신감을 이빠이 심어준다. 그리고 세손이 선물한 화각붓으로 그림을 그리라 한다.

자기가 도라에몽인가 보다 주문을 걸어 놨다네..쩝..

근데 나쁜 강별제가 송연이 경합때 쓸 안료에다가 못된짓을 해 놓는다 이건 정후겸이 시켰다..

드뎌 화서 경합이 열리고 화제는 추경(가을경치)이다..

송연이 안료를 보고 놀라 강별제에게 건의를 하자 강별제는 이상이 없다하고 묵살해 버린다.

송연은 세손을 생각하며 열라 열심히 그린다. 칼라로 못그리고 흑백으로만 그렸당..ㅜㅜ

결과 발표를 했는데 흑백으로 그렸는데도.. 5등했땅..

발표하는데 뒤에서 세손이 보면서 좋아라 한다.. 그러면서 끝...

21회 예고는

송연이 5위를 한 이유는 심사관의 평이 이렇다.

송연의 그림에는 가을뿐아니라 겨울까지 보인다네..

그리고 정후겸과 화환옹주는 송연을 빌미로 세손을 음해하려 하고

세손엄마는 홍국영을 불러 화환옹주가 제일 못된놈이라 조심하라 한다.

한편 난전에게 까지 정당하게 장사를 시킨다는 세손의 계획에 노론 전체는 자금줄이 끊어질까

총단결하여 세손의 무능함을 입증하려 최선을 다한다..

세손이 난전에게 장사를 시키려 하자 도성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목을 못들어 오도록

정후겸이 손을써서 세손의 개혁이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과연 세손과 홍국영은 이를 어떻게 극복할것인지 벌써부터 다음주가 기대된다.


요즘 이산 이라는 드라마에 푹빠져 홍국영의 말재주와 처세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멋진말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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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 옮겨 심는 나무는 잘 자라지 않습니다.

작정하고 터를 잡았으면 그자리에 뿌리를 내려야지요"

드라마는 어떻게 전개 될지 모르지만 역사의 줄거리에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것이다.

예상보다 홍국영이 장수 하지 못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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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영조 51) 12월 노병이 깊어진 국왕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긴장하였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기대를 모을 위치였으

나, 탐포하고 무지한 그를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로서 어미와 함께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鄭厚謙)에게 붙어 세손의 적당이 되었다.


그는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시강원(侍講院)의 궁료 홍국영(洪國榮)·정민시(鄭民始) 등을 참소하

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손이 대청(代聽)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청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쓰려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

다.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永陵)으로 격을 높였다. 그 다음에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垂恩墓)

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곧 홍인한·정후겸 등을 사사(賜死)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명의록(明義錄)》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혔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

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奎章閣) 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宙合

樓)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세손 때부터 시강원 열서(說書)로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元嬪)이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각신(閣臣)들

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抄啓文臣) 강제

(講製)도 주관하였다


Posted by 우리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