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리뷰2008. 1. 8. 21:35

이산에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을 했다.

실학자 박제가와

조선의 주먹 백동수의 등장이다.

등장부터 화려하게 등장했다.

박제가는 세손이 보위에 오른후에 서열허통을
 
통해 규장각 까지 들어간다.

과연 앞으로 세손을 도와

많을 일들을 할 그들이 누군인지 알아보자

박제가와 백동수

오른쪽 조선의 주먹 백동수 이다.

백동수(1743~1816)

 조선후기 무인. 호는 영숙.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반집안으로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많고 친구사귀기를 즐겼다.

그러나 그는 서자(庶子)출신이었기 때문에 능력이 있어도 오를수 있는 관직의 한계가

있음을 일찍 깨달았다.

 그는 주위에 여러 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과거에 응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활쏘기

와 말타기, 그리고 검술에 열망하였다. 그래서 당시 검술이 뛰어났던 검선(劍仙) 김광택을 찾아가

검술을 배우며 무인으로서의 기초를 다져갔다. 백동수는 1771년 식년무과 (경국대전의 규정대로 문

과 33명, 무과 28명만을 선발했던 과거시험)에 당당히 합격했으나 관직 수가 턱없이 부족해 벼슬을

얻지 못했다. 그는 아무런 미련없이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10년간 생활한다.

백동수

 그러던중 영조가 서거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는 국왕직속친위부대인 장용영을 개설함에 창검

의 일인자로 백동수를 다시 천거하였다. 1788년 그는 장용영 초관의 벼슬을 받게되었다. 이듬해 가

을, 백동수는 정조의 명으로 당시 규장각에 있던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군사무예서 편찬작업에 들

어간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는 발로 뛰어 문헌기록을 하나하나 살피고, 무예에 뛰어난 장교 여종주,

김명숙과 함께 군영마다 약간씩 차이 나는 무예의 기법을 통일하였다.

 그리하여 1790년, 각고의 노력끝에 보병무예 18가지와 마상무예 6가지를 합친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 지게 된다. 이 책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의 중앙 군영은 물론 팔도의 군영에 보급되

어 군사훈련의 교범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서거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802년 정월, 개혁정치와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던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을 반대했던 노론벽파에 의해 해체되었고 개혁인사들, 특히 군사

적 역량을 장악했던 무장들이 축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 역시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고 유배형

을 선고받는다.

 결국 장용영은 해체됬고 백동수는 1816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료후배들은 그를

가리켜 "다시 못볼 기남자"라 칭하였다.


박제가 [, 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

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調)·반정균() 등에게 새학문을 배웠으며 귀국하여 《북학

의》를 저술했다.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박제가

출생에서부터 신분적 차별을 받았으나, 일찍부터 시()·서()·화()로 명성을 얻었다. 19세 무렵

부터 북학사상의 선구적 인물인 박지원()을 스승으로 따르며, 이덕무(유득공(

) 등 북학파들과 서울에서 가까이 살면서 교유()하였다. 29세 때(1778) 청나라에 사은사(

使
)로 판견된 정사(使) 채제공()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연경()에 가서 건륭()시대

청조() 문물을 접하고, 이조원(調)·반정균() 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대표작 《북학의()》는 청나라를 가서 보고 들은 견문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으로 우리의 사

회적 폐단을 성찰하고 농기구·수레 등 기구의 개량과 사회제도의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듬해 정

조의 서얼허통() 정책에 따라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

)이 되었다.
Posted by 우리냥